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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여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 (다산초당) 여행 후기

by 노마드 여행자 2023.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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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대표적인 실학자이고 천주교 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인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과 다산 박물관을 여행한 후기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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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소개

다산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5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매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크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친구들이 눈썹 같다고 하여 그를 눈썹이 세 개 같다고 삼미라고 놀렸는데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스스로를 삼미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기도 하는 등 어릴 때부터 주변의 어떤 조롱에도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합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고난과 시련은 시작되었습니다.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1801년 3월 신유박해 때 노론에서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셋째 형 정약종이 순교를 택했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천주교를 등지고 신앙생활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어 경상북도 포항으로 유배를 떠났으나 이후에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8개월 만인 1801년 11월 포항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조정에서도 정약용의 학문적 깊이가 큰 것을 알기에 유배에서 풀어 벼슬을 주고 싶었으나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용보는 정약용이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 경기도 관찰사였는데 그의 비리를 고발하고 그가 파직되면서 둘의 악연은 시작되었고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 임금이 사망하고 서용보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우의정에 오르자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는데 힘을 쏟으면서 정 씨 형제들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전남 강진

전라도 강진은 다산 정약용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고 그의 외가는 해남 윤 씨이며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외가는 대대로 학자 집안이라 상당한 양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외가에 있는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강진에서 성이 뭐냐고 물으면 윤 씨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 일대에 윤 씨 집성촌이 많고 아직도 윤 씨 일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이 유배 시에 강진 현감이 이안묵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하게 여겨 유배 내내 냉혹하게 정약용을 대했다고 합니다.

 

가. 다산 초당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초당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덕산은 동백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며 정상인 깃대봉에 오르면 강진만과 가우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다산초당에서 약 11년을 보내며 후학을 가르치고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등의 서적 500여 권을 집필하면서 실학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다산초당-이정표-찾아가는 길
다산초당 이정표(좌), 올라가는 길(중앙), 다산초당(좌)

다산 초당은 강진 읍내에서 해남 방향으로 약 17km 정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으며 입구에 10여 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마을 공터에 주차도 가능합니다.

초당까지 입구에서 300여 미터를 걸어서 올라가는데 입구에 전통 찻집이 있고 그곳을 지나 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린이나 노약자들도 쉽게 오를 수 있고 10여분을 걷다 보면 10평 남짓의 작은 집 하나가 보이는데 유배지에서의 팍팍한 삶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초당 주변에 다산 4경인 약천, 정석, 다조, 연지석가산 등이 있고 백련사와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초당에서 백련사 등산로를 따라 100여 미터만 이동하면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다산 유배시절에는 없던 것인데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정조 임금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강진군에서 1975년에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나. 다산 박물관

다산 초당으로 가다 보면 마을 입구에 다산 박물관이 나타납니다. 사실 다산 초당과 백련사만을 생각하고 여행계획을 세웠는데 입구에 다산박물관이 있어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다산 정약용 관련 더 많은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입구에 주차장도 잘 만들어져 있고 공원도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공원 곳곳에 다산의 말씀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남긴 유명한 문구들을 비석에 새겨서 조각상 전시하듯 세워두었는데 말씀들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산박물관-공원
다산박물관 전경(좌), 비석 공원(우)

박물관 입장료는 어른 2천 원, 학생과 군인은 천 원,, 어린이 500원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18년간 강진 유배생활을 이해할 수 있게 구성해 놨고 전시실부터 영상관까지 큰 기대 없이 들어갔는데 정약용의 일대기와 그의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학생들에게 현장학습 최적의 공간인 것 같습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책들부터 수원화성을 설계내용과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해서 5.7km의 수원화성을 2년 9개월 만에 건축한 그의 업적 등을 알 수 있는 살아있는 학습장으로 강추합니다.

 

맺음말

다산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 시절 시험만 보면 1등을 했음에도 대과에서는 매번 낙방하여 32세가 되어서야 급제를 하였으며 어렵게 등용되었지만 가톨릭 교인이라는 이유로 탄핵받고 해미에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와 연천 현감의 비리혐의를 고발하여 공직자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했으나 이것이 훗날 이들의 복수로 억울하게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18년의 유배생활을 했지만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저술활동과 제자를 양성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으며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가와 백성만을 생각했던 다산의 마음이 아직도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남도 여행을 계획하신 분들이라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 현장인 다산초당을 방문해서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 다산박물관에서 다산의 생애 행적과 업적을 만날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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