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역사에서 최초의 세계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해리 바든에 대해서 궁금한 모든 것을 알려드립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1. 들어가는 글
"벤 호건의 전성기와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잘 치는 선수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를 목격한 대부분의 골프 팬들은 타이거 우즈에 투표하겠지만 골프의 역사를 아는 분이라면, 둘이 정식으로 겨뤄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을 것입니다.
"골프의 황제"로 불리는 타이거 우즈지만 "골프의 신"으로 불렸던 벤 호건을 이기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즈의 기술이 호건의 기술을 완전히 제압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골프에서는 다른 스포츠보다 특히 역사가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새로운 기술이 과거의 기술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00년보다 오래된 시절 세계적인 골프 스타에 등극했던 근대적인 골프 스윙의 아버지 해리 바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 골프 좀 치는 정원사, 해리 바든
1870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저지섬에서 태어난 바든은 동네 골프장에서 캐디를 하며 배운 골프로 80타쯤을 치는 실력이었습니다.
자기의 꿈인 정원사 일을 하던 바든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영국 본토로 간 동생에게서 놀라운 소식이 왔는데, 골프대회에서 2등을 해 상금 12파운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골프대회 한 번 나가서 자기의 연봉과 비슷한 상금을 받았다고 하니 자기도 정원사 일을 그만두고 골프 선수가 되자고 결심을 합니다. 동생보다 골프 실력이 더 좋았던 바든은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 본토로 간 바든은 요크셔의 9홀 골프장 프로로 취직했는데, 말이 프로지 멤버들의 클럽을 닦아서 정리하고 그린을 관리하는 등 하위계층이나 맡는 고된 직업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음껏 연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우선 스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립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바든은 다른 선수들의 모든 그립을 흉내 내며 연구한 결과 오버래핑 그립이 두 손을 일체화시키는데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오버래핑 그립을 사용하는 바든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영국 골퍼들은 그립을 바든 그립이라고 부르며 따라 했는데 이 그립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은 골퍼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그립이 되었습니다.
3. 혁신적인 스윙 테크닉을 개발한 해리 바든
바든은 그립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골프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스윙 테크닉을 개발해 성공했기 때문에 더 큰 존경을 받게 됐습니다.
바든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스윙을 "세인트 앤드루스 스윙" 이라고 부르는데 그 스윙은 두 손을 분리해 느슨하게 그립을 잡고, 백스윙은 낮고 길었으며, 스텐스를 넓게 벌려서 하체를 고정하면서도 상체는 심하게 스웨이를 하며 손과 손목을 사용해 볼을 쳐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세인트 앤드루스 스윙은 볼의 탄도가 낮고 많이 굴러가는 샷이므로 바람이 많은 링스코스에 적합하지만,바든의 스윙은 이미 모던 스윙의 기본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낮은 샷은 물론이고 볼을 높게 띄워서 더 많은 캐리를 하고 백스핀을 이용해 그린 위에 소프트하게 떨어지는 샷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4. 평생의 라이벌
바든은 26세이던 1896년 디 오픈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때 평생의 라이벌이 된 존 테일러와 제임스 브레이드를 만나 디 오픈 다승 경쟁을 시작합니다.
바든의 새로운 샷을 본 갤러리들은 감탄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스코틀랜드 선수들은 세인트 앤드루스 스윙을 고집하다가 바든이 1896년, 98년, 99년 디 오픈에서 세 번 우승을 한 후에야 그의 스윙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반 골퍼들 사이에 "바든을 보지 못했다면 아직 골프를 보지 못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그 소문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 바든은 무릎까지 오는 볼록한 모양의 니커보커 팬츠를 입으며 골퍼의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는데, 그 바지는 니커스라 불리기도 하고 무릎 아래로 4인치 내려온다는 의미로 "플러스 4"라고 불리기도 하며 유행했고 이후 골프 클래식 복장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5. 골프공 이름도 바든
1900년 새로운 골프공을 개발한 미국의 스포츠용품 전문회사 스팔딩은 그 공의 이름을 "바든 플라이어"라고 지은 뒤 판촉 모델로 해리 바든과 계약해 그를 미국으로 초대했는데, 계약 금액은 1,000파운드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큰 금액이었습니다.
바든은 미국을 돌면서 시범경기를 했고 미국의 골퍼들은 바든의 스윙을 모방하며 골프를 배웠습니다.
바든은 시범경기 도중 1900년 디 오픈 챔피언십 방어를 위해서 영국으로 잠시 돌아왔지만 평생 라이벌이었던 존 테일러에게 패해 2위가 되었고 3년 연속 우승의 꿈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6. US 오픈으로 설욕
1900년 바든은 US 오픈에 출전했는데, 이 경기에도 존 테일러가 참가해 두 선수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바든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든은 1913년, 1920년 US 오픈에서 2위에 그침으로써 1900년 우승이 유일한 US 오픈 우승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1914년 디 오픈에서 6승째를 달성했는데 5승에 그친 라이벌 존 테일러와 제임스 브레이드를 누르고 디 오픈 최다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메이저 대회 총 7승을 올린 바든은 1937년 6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메이저 대회가 두 개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바든의 7승은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7. 맺음말
미국 PGA에서는 바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매년 최저 평균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바든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는데, 해리 바든의 스토리는 100년도 넘은 옛날이야기지만 그가 창조한 스윙의 기본과 바든 그림은 아직도 많은 골퍼들과 함께 숨 쉬고 있으니, 그는 정말 위대한 골퍼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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