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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폐지를 이끈 미국의 최초 프로골퍼, 월터 하겐

by 노마드 여행자 2023. 2. 23.

골프는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시작됐으며, 귀족들의 스포츠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백인 귀족들의 전유물 골프를 흑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스포츠로 이끈 월터 하겐에 대해서 모든 궁금증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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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골프는 1890년부터 본격적으로 스포츠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골프장비들이 영국에서 수입된 것은 물론이고 골프장의 운영과 분위기까지도 영국의 시스템을 배웠습니다.

부유층 회원들인 멤버 중심으로 운영하는 클럽문화가 도입되었고 멤버들의 편의를 위해서 헤드 프로를 고용하는 방식도 같았습니다.

헤드 프로는 클럽으로부터 급여를 받고 골프용품점을 운영하며 멤버들의 골프클럽을 수리하고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멤버들은 헤드 프로를 캐디나 운전수 정도의 사회계층으로 인식했습니다.

대부분의 헤드 프로들은 캐디 출신이었으며 헤드 프로는 클럽하우스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회원의 심부름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면 종업원이 출입하는 뒷문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멤버들이 즐기는 장소에 감히 헤드 프로가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은 영국의 계급주의에서 도입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캐디 출신 골퍼 월터 하겐

가. 성장 과정

1892년 태어난 월터 하겐도 로체스터 컨트리클럽에서 캐디를 하며 골프를 배웠고, 14세에 보조 프로로 취직했는데 어린 하겐의 꿈은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19세에 헤드 프로가 되어 자유로운 연습라운드를 하며 기량을 닦은 하겐은 1914년 22세 때 US 오픈에서 우승을 하며 미국 골프계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US 오픈 챔피언이 되어도 클럽 멤버들이 하겐을 심부름꾼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캐디 시절부터 하겐을 보아왔던 멤버들의 의식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하겐은, 새로 생긴 명문클럽 오크랜드힐스 컨트리클럽의 헤드 프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연봉이 높아지고 골프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멤버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제한에서 자유롭다는 조건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새로운 클럽에서 캐디의 이미지를 지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겐은 이후 상류층 가정의 딸과 결혼했고 새 클럽에서 부유한 멤버들과 교류의 폭은 넓어졌지만, 클럽하우스 출입이 불가능한 계급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무렵, 아마추어골프 위주로 운영되는 USGA에 불만을 가졌던 헤드 프로들은 1916년 'PGA of America'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프로골프를 USGA에서 독립시켰는데 하겐은 PGA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9년 US 오픈에서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을 한 하겐은 헤드 프로 자리를 사직하고 플레이에만 전념하는 프로골퍼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월터 하겐은 '프로골퍼라는 직업'을 처음 만들어낸 선수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클럽 멤버와 프로골퍼 간 계급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나. 차별 폐지를 위한 활동

하겐은 1920년 디 오픈에 처음으로 참가했는데 당시까지 디 오픈에서 우승한 미국 선수는 없었습니다. 하겐의 참가는 매우 역사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고 시합을 하고 돌아오려면 한 달 가까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지만 28세 하겐의 목표는 확고했습니다.

미국태생 최초로 디 오픈에서 우승해 미국 골프가 영국을 앞섰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회코스에 도착한 하겐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클럽하우스 락커로 들어갔지만, 흰색 제복을 입은 직원이 황급히 달려와서 프로골퍼는 클럽하우스 락커에 들어올 수 없으니 골프용품점 뒤에 마련된 방을 이용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화가 난 하겐은 차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고 대회 첫날부터 고급 리무진을 타고 나타나 클럽하우스 앞에 주차를 하고 근처 호텔에서 식사를 배달시켜 먹으며 클럽하우스 출입금지에 항의했습니다.

반드시 우승해 열악한 처우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가본 링스코스는 미국 코스와 전혀 달랐고 하겐의 성적은 우승자와 26타나 차이가 나는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링스코스의 강한 바람을 얕잡아 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디 오픈에서는 낮은 탄도의 샷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하겐은 다시 돌아와 우승컵을 꼭 미국으로 가져가겠다고 큰소리치며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2년 뒤 하겐은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1922년 디 오픈에서 미국태생 골퍼 최초로 우승을 거머쥔 것입니다. 그때부터 골프 최강국의 지위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1920년 US 오픈에 참가한 하겐은 영국에서 겪었던 클럽하우스 갈등 문제를 미국에서는 꼭 해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주최자인 USGA와 미팅을 가진 하겐은 프로선수들에 대한 클럽하우스 개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거절할 경우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선수들을 설득해 대회 참가르 거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결국 USGA는 하겐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선수들은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며 감격했습니다.

프로골퍼가 상류층 클럽 멤버와 동등한 대우를 받기 시작하는 순간이었고 하겐은 프로골퍼들과 모금을 해서 인버니스 클럽의 클럽하우스에 아직도 남아있는 대형 벽시계를 선물했습니다. 

1928년 디 오픈 마지막 라운드에는 영국의 왕세자였고 훗날 킹 에드워드 8세가 된 에드워드 갤러리로 따라왔는데 우승자인 하겐에게 우승컵 클라레저그를 직접 수여한 왕세자가 며칠 더 머물며 함께 라운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다음날 라운드를 끝낸 왕세자와 하겐이 식사를 위해 클럽하우스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세자가 매니저를 호출해 연유를 물었고 전통상 프로골퍼 클럽하우스에 들어올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던 것입니다.

왕세자는 그 전통을 당장 고쳐 영국 전체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프로골퍼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부터 클럽하우스 출입이 가능해진 영국의 프로골퍼들은 감격하며 하겐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맺음말

메이저 대회 총 11승을 기록한 하겐은 당시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던 야구의 베이브 루스나 헤비급 복싱 챔피언 뎀퍼시 보다도 수입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골프팬과 동료 골퍼들로부터 최고의 존경을 받았고 영국의 골프 팬들은 하겐을 Sir Walter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1969년 77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열린 하겐의 추도식에서 아널드 파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월터 하겐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추도식을 골프용품점 뒤에 달린 작은 방에서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 골프 역사의 최고 풍운아였던 하겐은 프로골퍼이자 사회적 신분 차별에 저항한 사회운동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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