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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토너먼트의 숨은 독재자 "클리포드 로버츠"

by 노마드 여행자 2023. 3. 6.

마스터스 역사에 있어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고 세계 최고의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클리포드 로버츠"의 절대권력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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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클리포드 로버츠는 누구인가?

클리포드 로버츠는 1894년 아이오와주의 시골에서 태어났는데 동업자 바비 존스보다 8살 위였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로버츠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부모가 모두 자살한 후에 미국을 떠돌며 어렵게 생활을 했습니다.

떠돌이 생활로 뉴욕까지 오게 된 로버츠는 오일과 가스를 중개하면서 큰돈을 벌었고 증권중개인으로 명성을 쌓으면서 유명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3. 골프천재와의 운명적 만남

1930년 그랜드 슬램 달성 후 깜짝 은퇴를 선언했던 바비 존스는 1931년 뉴욕을 방문했다가 지인의 소개로 로버츠와 만나게 되었는데, 바비 존스의 꿈이 최고의 골프장을 만들어 골프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 로버츠는 자기와 동업으로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두 사람은 바비 존스의 고향인 조지아주 오거스타에 45만 평의 부지를 매입했고 비로소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건설이 시작된 것인데, 공사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자금조달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4. 세계 최고의 골프장을 꿈꾸다

미국 전역에서 1,800명의 멤버를 모집해 자금을 모으는 계획이었는데, 겨우 76명밖에 모집되지 않았습니다.

로버츠는 대규모 클럽하우스 건설도 포기하고 골프장 주변 땅을 택지로 팔아보려 했지만 고작 한 필지만 팔려 결국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골프장을 살리는 길은 멤버 모집 밖에 없다고 생각한 로버츠는 단기간에 골프장을 홍보하기 위해 US 오픈을 유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USGA가 그 제안을 거절해서 US 오픈 유치를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로버츠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 주관하는 골프대회를 기획해 1934년에 제1회 마스터스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1930년에 은퇴하고 대회 출전을 중지했던 바비 존스를 설득해 직접 참가하도록 했고 유명선수들에게 보내는 참가 초대장에도 바비 존스가 직접 서명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다행히도 바비 존스의 초대장을 받은 당시 최고의 프로선수들 대부분이 골프장 홍보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 골프 기자들이 US 오픈보다도 분위기가 더 좋았다는 평가를 하는 등 많은 호평이 쏟아지자 새로운 멤버 20명이 입회했는데, 그 과정에서 얻게 된 6천 달러의 수입으로 채권 이자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로버츠는 마스터스 개최를 통해 방향을 확실히 잡았습니다. 매년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멤버를 늘려 나가면 파산으로부터 회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마스터스를 최고의 대회로 만들기 위해서 로버츠가 처음 도입한 아이디어들은 현재 모든 골프대회의 표준이 되었는데,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대회 운영 방식 중 다수가 로버츠 머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로버츠가 최초로 도입한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선수들의 성적을 언더파와 오버파 기준으로 비교한 것입니다.

이 방식을 도입하기 전에는 선수들이 친 총 타수만 표시되어 직접 비교가 어려웠었는데, 언더파는 빨간색 숫자로 쓰고 오버파는 초록색으로 표기한 로버츠 방식에서는 비교가 쉬웠습니다.

이 외에도 최초로 골프경기를 라디오로 생중계했고, 당일의 티타임표를 인쇄하여 갤러리에게 배포했으며 갤러리 로프를 설치해 선수와 관중을 분리시켰고, 코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리더보드들을 설치해 선수가 자기의 순위를 확인하며 플레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5. 마스터스를 세계 최고의 대회로 만든 로버츠의 절대권력과 최후

로버츠가 주도한 마스터스 대회 방식은 미국 전역에서 선수들이 가장 우승하고 싶어하는 대회로 발전했으며, 최고의 수익을 가져오는 마스터스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통해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마스터스가 최고의 대회가 되자 마스터스의 기획자 로버츠 역시 절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훗날엔 마스터스의 독재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선수든 기자든 마스터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사람은 다음 대회의 초대장을 받지 못했고 중계방송의 캐스터가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다음 방송에서 퇴출되었습니다.

출전선수였던 Frank Stranahan은 연습라운드에서 볼을 두 개 이상 쳤다는 이유로 출전금지처분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흑인 선수의 출전을 거절하는 인종차별정책을 펼쳐 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1934년 제1회 마스터스 대회부터 회장으로 일했던 82세의 로버츠는 1976년에 말기암 판정을 받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는 회장으로서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추진해 왔는데, 바로 1933년 파산위기 때 팔았던 1번 그린 뒤의 주택부지에 지어진 집을 사서 없애는 작업이었습니다.

골프장의 어떤 홀에서도 건물이 보이지 않았는데 1번 홀에서만 그 집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1977년 9월 걷기조차 힘들었던 로버츠가 클럽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매니저를 불러 자기를 부축해 1번 홀 티로 나가자고 지시했고 1번 홀에서 그린 뒤의 집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로버츠는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파3 코스의 호숫가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덤을 남기지 말라는 유지에 따라서 화장 후 유골을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에 뿌렸다고 합니다.

6. 맺음말

요즘도 마스터스의 정책을 바꿔야 하는 중대 사안이 있을 때마다 대회 운영위원회에서는 "만일 클리포드 로버츠가 살아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에서부터 회의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마스터스 대회를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대회로 만든 로버츠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스 골프대회의 숨은 독재자 클리포드 로버츠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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