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 우즈를 우리는 천재 골퍼라고 부르는데 골프 태동기인 90년 전에 골프 역사상 최초의 골프 천재라는 명성을 얻은 선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비비 존스였는데 천재 골퍼 바비 존스의 쓸쓸한 최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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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평생을 아마추어 골퍼로 활동했었던 바비 존스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등 프로 골퍼들에게는 공공의 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비 존스가 출전한 대회에서는 프로 골퍼들 사이에 묵시적인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누가 우승을 해도 좋으니 바비 존스의 우승을 저지해야 한다는 합의였는데,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고 공부 때문에 연습을 적게 하는 바비 존스에게 패배하는 것이 프로선수들의 자존심을 크게 자극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재 골퍼 바비 존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 천재 골퍼 바비 존스의 생애
가. 골프선수로서 화려한 경력과 부의 축적
바비 존스는 프로 선수들과 경쟁하는 US 오픈에서 4회 우승, 디오픈에서 3회 우승을 했으며, 1930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스물여덟 살에 전격 은퇴하자 프로 선수들은 그의 결정을 크게 반가워했습니다.
은퇴하여 골프사업을 할 수 있게 된 존스는 영화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하여 10분짜리 레슨 필름 12개를 제작했는데 미국 전역의 6,000개 영화관에서 상영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고, 또 스팔딩 사와 손잡고 아이언 클럽 디자인에도 참여하여 존스 이름의 아이언을 발매했는데 베스트 샐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은퇴 첫 해에 바비 존스의 수입은 30만 달러가 넘었는데 그 해 PGA 투어 상금왕 진 사라센의 총상금이 2만 5천 달러에 불과했었고, 순수 상금으로 넌 수입 30만 달러를 넘긴 선수로는 잭 니클라우스가 처음이었는데 약 40년 후에나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나. 불치병 발병
은퇴 후 변호사 생활을 하며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건설하고 마스터스 대회를 개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며 인기를 누렸던 존스의 말년은 불행했습니다.
가끔 등쪽에 큰 통증이 있었던 존스는 마흔여섯 살에 마지막으로 18홀 라운드를 한 후 더 이상 골프를 칠 수 없었는데 신경이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척수공동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존스는 50세가 되기 전에 무릎에 보조 보행기구를 착용하고 지팡이를 짚을 정도로 병세가 약화되었는데, 그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존스는 품위를 잃지 않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골프 코스에서 볼이 놓인 대로 쳐야 하듯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많은 골퍼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는 문구가 되고 있습니다.
다. 투병 중 활동
존스가 가장 좋아한 코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였습니다.
그가 그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데, 1927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린 디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 그는 우승 연설 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우승을 했으니 내 생애에 더 이상 우승을 못하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오늘 받은 우승컵은 미국으로 가져가지 않고 세인트 앤드루스에 남겨놓고 떠나겠습니다."
그날 스물다섯 살의 존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시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1년 후, 1958년에 세인트 앤드루스 시에서 바비 존스에게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1759년 벤저민 프랭크인에게 명예시민증을 준 이후 2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존스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의 대강당에서 열린 명예시민증 수여식에 참가했는데, 축사에서 시민이 된 존스는 이제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토끼를 잡을 수 있고, 올드 코스의 페어웨이에 디봇을 내면서 골프를 쳐도 되며, 18번 홀 옆에 빨래를 널어도 되는 권리를 인정받았습니다.
답사 차례가 된 존스는 척수공동증 때문에 휠체어에서 연설할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일어나 사력을 다해 연단으로 이동했습니다.
꽤 오래 걸렸던 존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1,700명의 축하객들 사이에는 충격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존스는 준비했던 원고를 꺼내지 않고 세인트 앤드루스 시민들의 사랑과 우정을 잊지 않겠다는 답사를 했습니다.
존스는 무대 아래에 준비된 골프카트를 타고 퇴장했는데 골프 카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침묵을 지키던 축하객 중 한 사람이 "그대 다시 돌아올 거죠?"라는 제목의 스코틀랜드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울면서 따라 불렀고 존스가 퇴장한 후에도 10분 이상 아무도 퇴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날이 존스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라. 천재 골퍼 바비 존스의 쓸쓸한 최후
존스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스터스 대회의 시상식에는 언제나 존스가 참석해서 챔피언과 악수하며 축하해 주었는데 1968년 마스터스에서 중계방송사인 CBS가 존스의 모습을 생중계로 내보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해 보여서 시청자 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해 보여서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이후 존스는 마스터스 시상식에 더 이상 참석할 수 없었고 술과 담배의 양을 늘려가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오거스터 내셔널 골프클럽의 회원들은 존스의 동상을 세우려 했지만, 그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영구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사양했습니다.
오거스터 내셔널이 영원하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영구 회장이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971년 69세의 존스가 세상을 떠나자 클럽에서는 존스를 영구 회장으로 추대했고 지금도 마스터스의 입장권에는 방문을 환영하는 인사말이 바비 존스 회장의 이름으로 인쇄되고 있습니다.
3. 맺음말
미국의 골프 영웅들 중에서 바비 존스처럼 단명했던 선수는 없었습니다.
바비 존스의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고 애틀랜타시 공동묘지에 묻힌 존스의 묘비에는 이름과 출생일 그리고 사망일만 적혀 있습니다.
천재 골퍼라는 화려한 수식어에 비해 매우 겸손한 모습이지만, 그를 잊지 않고 찾아간 팬들이 남긴 골프공들은 여전히 그가 골퍼였고 누구보다 뛰어났던, 타고난 천재 골퍼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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